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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눈밭에 찍은 풍경

이정희 시인 둥그레동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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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7.01.24 19:24
  • 기자명 By. 충청신문
 
[충청신문=이정희 시인 둥그레동인회장] 눈이 내렸다. 보기에도 탐스러운 함박눈이 내리는 대로 쌓인다. 얼마 후 눈을 흠뻑 뒤집어쓴 채 서 있는 도서관 뜰의 나무들. 정원수는 정원수대로 작은 떨기나무는 또 그대로 하얀 털외투를 걸치고 있는데, 얼마나 예쁜지 동화 속 나라에 온 것 같다. 눈이 내리면 당연히 소복소복 쌓이는데 무에 새삼스러울까만 열흘 전에도 오늘처럼 함박눈이 잔뜩 내리고는 푹한 날씨에 금방 녹아버렸다.
 
모처럼 함박눈이 왔다고 어린애마냥 좋아했었지. 사진을 찍어서 눈이 내리지 않는 미국 언니에게도 보내려고 잔뜩 별렀는데 잠깐 새 녹고 말았다. 교통 체증을 생각하면 다행이었으나, 눈이 쌓이면서 가습기처럼 습도를 조절하기 때문에 건조한 날씨가 눅진해지고 호흡기 계통의 질병이 줄어든다면 하루 이틀 불편한 것쯤은 참을 수 있어야겠다.
 
무엇보다 추워야만 녹지 않고 쌓이게 되는 배경이 색다르다. 우리 잘 아는 히말라야니 킬리만자로니 하는 신비의 만년설도 녹을 새 없이 계속 추운 그 지역의 특징 때문이다. 행복이나 행운도 불행이 지나간 뒤 찾아와야지 우리 원하는 대로 날마다 즐겁고 행복하면 따스한 날 내린 눈이 금방 녹아버리듯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불행은 결국 추운 날씨 같아서 우리 늘 힘들지만 그게 아니면 오래 가지도 않거니와 절박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최근 들어 겨울이 춥지 않았다. 지금은 벌써 1월도 중순이지만 손끝이 시리게 추운 날은 불과 열흘 남짓이었다. 궂은 날씨를 헤쳐 갈 동안 힘든 세상을 이겨나갈 힘도 생기지 않을까. 겨울이 아니어도 여름의 무더위 또한 만만치 않으나 여름내 무더위에 시달렸다면 얼마 후에는 그 반대 즉 겨울의 추위를 극복할 동안 여름내 누적된 열기가 감해진다는 게 자연스럽다. 결국 지나치게 무더운 여름도 나름 내성이 생기는 폭인데 바로 그 겨울의 냉기를 극복하는 과정도 없이 생략된다면 균형이 깨지는 등의 무리가 따를 수 있다.
 
다시금 스쳐가는 창밖의 풍경. 똑같이 쌓인 눈인데 지난주 금방 녹아버린 것과는 달리 추운 날씨에 그냥 남아 있는 게 무슨 섭리처럼 엄숙해 온다. 겨우내 춥지 않고 따스하다 보니 지난주 모처럼 내린 눈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에 비하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세상을 보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번에 내린 눈은 그나마 며칠간 추웠다고 한나절이 넘도록 제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또한, 그렇게 살 경우 힘들고 괴로워도 모처럼의 행운이나 소망을 오래 가도록 하기 위한 바탕화면일 테니까.
 
아무려나 눈 쌓인 도서관에서의 하루가 유달리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면서 모처럼 쌓인 눈을 완상하던 그 행복이 천금보다 소중했다. 이따금 가서 글을 다듬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기는 해도 오늘 그 하얀 솜이불처럼 혹은 수많은 눈꽃송이 만발한 것 같은 풍경 때문에 더 푹 빠지는 것 같은 느낌은 흔치 않았다. 춥기는 하지만 그로써 내리는 대로 쌓인 정경도 내 삶의 바탕화면에 눈처럼 아름답게 표백될 테니까.
 
해거름이 되자 윙윙 몰아치는 칼바람. 청미천 기슭을 돌아가니 눈이 그 새 꽝꽝 얼어붙었다. 함박눈이면서도 얼른 녹지 않는 게 이번 추위는 제법 오래 갈 듯하다. 설날을 며칠 앞둔 세 밑이라 추울 때도 되었다. 그간 푹했던 것을 생각하면 짱짱해질 추위가 두렵기도 하고 기온이 떨어지고 난 뒤의 교통 혼잡도 문제였으나 그게 아니면 1월이 가도록 눈 풍경 하나 없이 삭막했을 것이다. 하얗게 쌓인 백설의 원시림은 모처럼의 추위가 만들어 낸 걸작품이었다. 좋다고 해서 다 좋은 게 아니듯 나쁘다고 해서 모두가 나쁘지 않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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